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베를린 공방전 (문단 편집) === 젤로[* 많은 자료들에서 '젤로프'라고 쓰고 있지만 Seelow에서 w는 o의 장음 역할을 하기 때문에 발음되지 않는다. 이 같은 발음법은 동부 지방의 지명이나 인명을 읽을 때 사용된다.] 고지 전투 === [[파일:Berlin5.jpg]] 젤로 고지를 돌파하고 베를린으로 진격하는 소련 육군의 T-34-85 중형전차. 사령부에 돌아온 원수들은 서둘러 공세를 준비했고, 4월 16일 북에서 남으로 제2벨라루스 전선군(로코솝스키), 제1벨라루스 전선군(주코프), 제1우크라이나(코네프) 전선군이 일제히 공세를 시작했다. 이 작전들을 통틀어 '''오데르-나이세 작전'''이라고 한다. 북쪽의 로코솝스키 군은 오데르 강을 건너 25일 제틴을 탈취하고, 베를린의 동북쪽으로 진출했다. 남쪽의 코네프 군은 독일의 [[페르디난트 쇠르너|쇠르너]] 군을 쉽게 돌파하고, 4월 25일 동진하던 [[미합중국 육군]] 부대와 엘베 강 연안의 '''레크비츠(Leckwitz)에서 조우했다.'''[* [[http://gall.dcinside.com/list.php?id=worldwar2&no=25685|많은 역사서에 여기가 아니라 '토르가우'(Torgau)로 오기되어 있다.]]][* 승전 30주년이 된 1975년에 진행된 역사적인 미/소 합작 우주 미션 [[아폴로-소유즈 테스트 프로젝트]]에서도 양측 우주비행사 [[알렉세이 레오노프]]와 [[토머스 스태퍼드]]는 이 엘베 강 상공에서 처음 악수를 할 예정이었으나 간발의 차로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상공에서 만났다.] 이로서 독일군은 남북으로 분단되었고, 로코솝스키 군도 [[영국 육군]]과 엘베 강 연안에서 만났다. [[파일:Berlin6.jpg]] 다리를 건너는 미군을 도와주는 소련군. [[파일:Berlin7.jpg]] 엘베 강에서의 미군과 소련군. 서로 [[방탄모]]와 [[우샨카]]를 바꿔 쓰며 장난을 치고 있다. 여담으로 엘베 강에서 미군과 소련군은 처음으로 군인 대 군인으로 서로 조우하게 되었는데, 서로를 보는 시각 차이로 인한 에피소드가 몇 개 있다. 미군 부대와 처음 조우한 소련군 부대는 모습이 미군보다 훨씬 후줄근해서, 이를 본 미군들은 >"이런 녀석들이 어떻게 그 [[독일 국방군|독일군]]을 이겨 온 거지?" 라는 의문을 품었다고 한다. [[반공]] 사상이 강했던 몇몇 미군들은 >"저 정도 수준의 소련군이라면 나중에 [[미군 vs 소련군|우리가 소련과 붙어도]] 쉽게 이길 수 있겠다." 는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. 또한 동양계 장병들이 다수 소속된 소련군 부대를 보고, 소련군들은 [[훈족]]의 후예라고 생각한 미 육군 장교도 있었을 정도로 미국인들은 소련을 얕잡아보았다. 물론 [[6.25 전쟁|몇 년 후]]에 [[MiG-15|미그 앨리에서 예상 외의 대가를 치르고]] 나름 대비에 들어갔지만, 미국은 실제로 1957년 소련이 [[스푸트니크]]를 발사한 뒤에야 [[스푸트니크 쇼크|소련이 절대로 만만치 않은 상대라는 것을 깨닫고 본격적인 대응에 들어갔다.]] 이와 반대로 소련군들은 [[미군/물량|미군의 부유함]]에 크게 놀라면서도 미군의 행동이나 문화를 이해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줬다. 대표적으로 [[방탄모]]를 들 수 있는데, 미군은 모두 [[M1 철모]]를 썼던 반면 소련군들은 상당수가 철모 대신 [[개리슨모]]나 [[정모]]를 쓰고 있었다. 소련이 밀리던 [[독소전쟁]] 초반에는 많은 장비들을 잃고 공장들을 옮기느라 철모가 많이 부족했지만, 그 후 소련의 생산력이 나아지면서 소련군 또한 개개인들에게도 방탄모가 부족하지 않게 지급되었다. 그러나 그동안 이미 방탄모 없이 다니는데 익숙해진 소련군 장병들은 '어차피 방탄모 써도 몸통에 총 맞으면 끝장이고 괜히 무겁기만 하다.'[* 이 시대의 방탄모는 소총탄을 막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다. 케블라를 압축해서 만드는 현대의 방탄모도 중량 등 실용적 이유로 권총탄 방호를 방호력의 기준으로 삼기 때문에 교전 거리 내의 소총탄은 못 막을 가능성이 크다. 이 시대의 방탄모는 그저 파편을 막는 것에 의의를 두는 수준이었다. 다만 파편에 의한 사상자가 상당히 많았기에 이 정도로도 충분히 의미가 있었던 것이고, 이는 현대에도 마찬가지이다.]라는 핑계를 들며 방탄모 쓰는 것을 선호하지 않았는데, 전원이 철모를 쓰고 있는 미군들의 모습이 그들에겐 이상해보였던 것이다. 미군의 경우 철모의 보급도 충분히 완료된 데다가, 전장에서 납득할 만한 사유[* [[전차병]] 등 특수한 병과거나 전투 중 분실했는데 남은 방탄모 수량이 없어서 쓸 게 없었을 때였다.] 없이 방탄모를 쓰지 않을 경우 꽤 거액의 벌금을 급여에서 공제했기 때문에 방탄모 착용을 그 어느 국가보다 충실히 했다. 또한 미군의 [[총검]]도 소련군들의 주의를 끌었는데, 그저 찌르기밖에 할 수 없는 자신들의 꼬챙이 모양의 스파이크형 총검[* 이것도 나름 이유가 있는데, 생태가 순식간에 동태가 될 정도로 추운 러시아의 총검이다 보니 적이 입은 두꺼운 [[방한복]]을 뚫기 위해 이런 형태로 만들어진 것이었다. 그래서 당대의 소련군 총검은 다른 국가들의 총검보다 길쭉하고 뾰족한, 총검이라기보다는 총창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디자인을 하고 있었다.] 대비 제대로 단검의 형상을 하고 있어 찌르기 외에도 베기에 적합하고, 초근접전에서 총검만 빼들고 사용하거나 각종 도구로 사용할 수 있는 미군 총검의 기능성과 고급지고 튼튼한 품질에 모두 감탄했지만 미군들이 그 좋은 총검을 근접전보다는 [[통조림]] 따는 데 더 많이 쓴다고 얘기하는 걸 듣고는 실망했다고 한다.--[[소련군]]: 그렇게 쓸거면 차라리 우리 줘.--[[https://book.naver.com/bookdb/book_detail.nhn?bid=13708475|출처]][* 이런 일선의 요청 사항들을 반영했는지 훗날에 나오는 AK용 총검은 제2차 세계대전 시대의 총검보다 도구로써의 쓰임새(철조망 절단 기능이나 작은 톱날 추가 등)가 더 많아졌고, 미군 역시 이에 영향을 받아 M9 총검을 만들었다.] [[파일:Berlin8.jpg]] 베를린으로 향하는 소련군. 전선 중앙에 있었던 [[게오르기 주코프|주코프]]의 제1벨라루스 전선군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지점 작전에서 패주한 후 젤로 고지로 후퇴하여 포진하고 있었던 독일의 비스툴라 집단군이었다. 이 부대는 독소전쟁 초반부터 '''수비의 달인'''이라고 알려져 있었던 [[고트하르트 하인리치]] 장군이 3월 말에 사령관으로 부임하여 지휘하고 있었으며, 병력수는 소련군이 거의 10:1로 압도적이었으나 지형면에서는 소련군의 움직임을 관찰하기 쉬웠던 고지에 위치한 독일군이 훨씬 유리했다. 하인리치는 소련군이 오데르 강변의 [[아우토반]]을 타고 베를린으로 진격할 것을 정확하게 예측하고 있었다. 따라서 그는 [[공병]] 부대를 투입해 오데르 강 연안의 [[저수지]]를 역류시켜 진격로를 습지로 만들어 놓았고, 이 뒤로 [[참호]]와 [[벙커]], 대전차호로 이루어진 세 겹의 방어선을 만들어 놓은채 소련군을 기다리고 있었다. 이렇게 전략적으로 조성된 인공적인 습지뿐만 아니라 [[라스푸티차|봄철의 해빙까지 겹쳐 도로가 진창이 되는]] 바람에 소련군의 진격은 한층 어려워졌다. 하지만 주코프는 누구보다 베를린을 먼저 공략해야 한다는 조급함에 사로잡혀 '''이에 대한 대비를 하지 않았고,''' 늘 해왔던 것처럼 그저 압도적인 병력을 이용한 진격으로 이를 돌파하려고 했다. [[파일:external/resources3.news.com.au/065711-russian-general-georgy-zhukov.jpg]] 전황이 악화되자 굳은 표정의 [[게오르기 주코프]].(주변의 다른 장교들도 표정이 굳어있다.) 4월 16일에 소련군은 [[카츄샤 다연장로켓]]을 시작으로 10,000문이 넘는 각종 야포로 맹포격을 한 뒤 젤로 고지로 쳐들어갔지만, 끝없이 펼쳐진 습지 때문에 진격이 지체되었다. 진격 속도가 예상보다 심하게 느려지자 스탈린은 주코프에게 전화를 걸어서 >"동무, 왜 이렇게 느리오? 코네프 동무가 대신 베를린으로 가도 되겠소?" 라며 닦달했다. 주코프는 이 말을 들고 더욱 조급해져서[* 당시 스탈린이 주코프 군과 코네프 군의 전투 지경선을 없애 버리기까지 해서 경쟁을 더욱 부추기고 있었던 상황이었다. 주코프는 이 때문에 여유가 없이 굉장히 급한 상황이었다.]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예비 병력까지 투입하는 오판을 저질렀으며, 시간이 걸리더라도 우회를 하거나 조금만 기다렸다가 먼저 적진을 돌파한 다른 전선군의 도움을 받았으면 쉽게 공략할 수 있었던 곳에서 결국 엄청난 사상자를 냈다. 이 때문에 젤로 고지 전투에서 독일군의 사망자가 10,000여 명에 불과했던 반면, 소련군은 적어도 30,000명의 사망자를 냈다.[* 많이 잡으면 70,000명까지 나왔다고 한다.] 병력 차이가 10:1인 압도적인 우세 상황속에서 이렇게 적군보다 더 큰 피해를 낸 것은 명백한 지휘 부실이었으며 주코프의 흑역사로 알려져 있다. 이 전투는 사실상 동부전선에서 독일군이 거둔 마지막 승리로 평가된다. 그러나 병력이 워낙 열세인 데다가 보급과 증원도 거의 없었던 독일군은 더 이상 소련군을 저지하지 못했고, 소련군은 3일 간의 맹공과 큰 희생 끝에 결국 젤로 고지를 가까스로 돌파하는데 성공하며, 베를린 공략의 주공은 주코프가 맡았다. 참고로 경쟁에서 패배한 코네프는 끝내 베를린에 가지 못하고 [[체코슬로바키아]]의 [[프라하]]에서 멈춰야 했고, 로코솝스키는 베를린 대신 [[동프로이센]] 지역의 공략을 맡았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